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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전후 강경애의 행적 연구
2010년 01월 26일 01시 03분  조회:945  추천:26  작성자: 리광인

         
              1931년 전후 강경애의 행적 연구

 

 

2005 1-2월 사이 문화산백사이트에서 벌어진 인터넷 강경애 시시비비에서 필자는 강경애의 첫 간도행은 1931이란 글을 써서 올린적이 있는데 이 글과 시시비비 관련 글들은 2006 11월에 한국학술정보()”에 의해 출판된 나의 연구론문집—“조선족역사문학연구문집”(2)에 실리였다. 이 글은 강경애가 1929년에 연변 룡정으로 들어왔다는 기존의 설이 틀림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럼 1929-1931년 사이 강경애는 어디에서 살았고 무엇을 했을까, 이를 옳바르게 밝히는 것은 강경애가 1930 1월 김좌진장군 피살과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아진다.

 

1. 강경애의 어린 시절과 학교시절

 

 이름난 녀류소설가로 불리는 강경애는 조선 황해도 송화 (오늘의 황해남도 송화군)출신이다. 중국의 일부 조선족학자들은 황해도 장연으로 알고있는것 같다. 생졸년월일도  1907-1943 설과 1906-1944 가지로 반복된다. 어린 시절도 어떤 이곳 학자들은 조실부모로 알지만 사실은 워낙 털면 먼지뿐인 살림에 아버지가 강경애 4 사망한데서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는 살길을 찾아 황해도 장연 (오늘의 황해남도 장연군) 최도감의 후처로 들어선다. 어린 경애도 다섯살 어머니를 따라 장연으로 이주하고 유년기를 장연에서 보내게 된다. 어떤 학자들이 강경애의 고향이 장연이라 하고, 장연의 풍경이 훗날 강경애의 작품에 작품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것도 때문이다.

여덟 살이 되던 무렵 강경애는 그의 의붓아버지가 보던 춘향전에서 한글을 깨우치고 삼국지”, “옥루몽”, “조웅전”, “숙향전 고대소설들을 독파하기에 이르렀다. 시절에 벌써 동네사람들에게 불려 다니며 소설을 읽어주어 《도토리 소설 장이》라는 특이한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니 장래 녀류소설가의 싹수가 보인 같다. 생활의 어려움으로 살이 지난 1915년에야 어머니의 애원과 간청으로 겨우 장연녀자청년학교를 거쳐 장연보통학교에 입학, 열여섯 무렵인 1921년에는 형부의 도움으로 평양 숭의여학교에 진학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던 1923 3학년 학교내 한차례 동맹휴학에 뛰어들었다가 퇴학당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1924 봄에 강경애는 서울의 동덕녀학교에 편입하여 1 수학. 무렵이던 1923 3, 일본 와세다대학 예과 졸업생 양주동이 고향 장연으로 돌아왔고 조혼에 의한 결혼을 파기하기에 이르렀다. 때는 양주동이 반봉건사상을 외치며 강연하던 시절이고 문학적 재질이 높이 평가되던 시절이라 문학도 강경애의 숭배의 대상이 되기에 족했다. 그들은 자주 만났고, 1924 5월에는 책한권이란 시를 양주동이 주재하는 금성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양주동과의 교류에서 획기적인 것은 시를 즐기는 강경애에게 소설을 쓰도록 권했다는 양주동이다. 1년이 지나 강경애는 양주동과 헤어졌다고 하나 작가로서의 생애가 펼쳐지니 행운이라 해야겠다.

 

 2.       1929년을 전후한 장연 생활

 

1924 9 강경애는 서울 동덕녀학교를 중퇴하고 장연으로 돌아갔다. 장연에서 강경애는 가을”(1925.11), “다림불”(1926.8)이란 시를 발표했고 1929 10월에는 염상섭의 평론을 비판하는 염상섭 씨의 론설  <명일의 > 읽고 조선일보에 발표한다. 독후감 형식으로 글은 사회현실에 대한 나름의 안목으로 자기의 생각을 리론적으로 펼치려는데서 의미를 보여준다.

강경애는   시론 조선녀성의 밟을 조선일보 문예란 (1930.11.28-29), 단편소설 파금 조선일보 문예란 (1931.1.27-2.3), 비판문 양주동 군의 신춘평론반박을 위한 반박 강악설이란 필명으로 조선일보 (1931.2.11) 발표한다. 1931 이해 8월부터 1932 12월까지는 혜성지에 장편소설 어머니와 련재하기에 이른다. 장연에 돌아온 몇년사이 강경애는 감상적인 시를 쓰던 문학소녀로부터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는 녀류작가로 성장해 간다.

장연으로 귀향한후 강경애는흥풍야학에서 가난한 애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근우회 장연 지회 설립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일으킨다. 근우회는 비밀정치단체인 신간회의 자매단체로서 사회주의 녀성운동 측과 기독교 녀성운동 측이 같이 1927년에 설립하고 1928년과 1929년에 산하 지회들이 전국에서 많이 조직된다. 1929 5월에 근우회 본부는 장연지회 설립안을 가결하고 그해 6 10일에 근우회 장연지회 야유회를 가진다. 이날 야유회에서 강경애가 장연지회 서무부장 직책으로 개회사를 했다고 하니 장연에서의 강경애 활동모습을 엿볼수가 있겠다.

그뿐이 아니다. 1929년 강경애의 장연활동은 1929 10월의 그의 글 염상섭 씨의 론설  <명일의 > 읽고에서도 나타난다. 글에서 강경애는 장연 근우회 지회 강경애라고 밝히여 1929 5—9월기간 장연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글에는 “9 17 추석 달밤이라고 씌여있어 이해 추석까지도 장연모습을 환히 보여주고 있다.

이로부터 보면 강경애가 1927 봄부터 중국 해림지역에 거주하고 김봉환 동거자와 같이 박상실을 사주해 1930 1 24 김좌진장군을 암살케 했다는 이강훈의 진술은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3.     강경애의 남편 장하일은 어떤 사람인가?

 

(1) 장하일은 누구인가?

 

강경애와 그의 문학연구, 강경애의 생애를 쭈욱 보면 강경애의 생활에 뛰여든 남자는 오직 두사람 뿐인데 사람은 본문에서 간단히 스치고 지난 평양 숭의녀학교와 서울 동덕여학교 시절의 양주동이고 두번째는 그의 남편 장하일이다. 장하일에 대해서는 아는것이 별반 없으나 룡정 동흥중학교 교원시절 모습과 부부생활 모습은 조금 보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족 문학평론가 최삼룡선생은 문화발굴《간도생활과 강경애의 문학》이란 한편의 (연변문학 2003 4월호)에서 강경애는 1931년에 황해도 장연에서 수원 농업전과를 졸업하고 장연군 군청서기로 있던 장하일과 결혼하고 해에 룡정에 이주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사실이 그러하다. 시기 이전의 장하일 경력은 모르나 황해도 황주 (오늘의 황해북도 황주군) 사람이고 수원 농업전과 출신인 장하일이 장연 군청서기로 부임한후 강경애의 집에 세들어 살면서 강경애를 알고 련애하고 결혼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31 6월경에 장연을 떠나 중국 룡정으로 때는 이미 결혼한 후였다.

이들 부부가 룡정에 이주한 후 장하일은 룡정을 떠나기까지 줄곧 동흥중학교 수학교원, 교도주임으로 근무했는데 1934년의 동흥중학교 교장은 림계학이고 교원은 장하일 등 6명이었다. 여러가지 관련자료를 보면 장하일이 룡정행을 결단한것은 교장 림계학과 관련되고 있다.

교장 림계학은 조선 함경남도 사람이고 보성전문학교 법과 출신으로서 1924 7월에 벌써 동흥중학교(1921 4 15일 설립) 교원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이며 조선공산당 화요계 당원으로 활동한다.

 

(2) 림계학은 누구인가?

 

조선공산당은 1925 4 17-18일 서울에서 창립된 정당으로서 4 18일 제1차 회의에서 중앙지도기구를 내오고 산하에 해외부, 만주총국, 일본부를 설치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19265 16일에 중국 북만의 주하현 일면파에서 조공당 만주총국이 조직되고 이해 10 28일에 동만의 연길현 룡지향 삼성촌에서 조공당 만주총국 산하 동만구역국이 조직되였다. 림계학은 동만구역국 9명 위원중의 한 사람이였다.

1927 10 2, 일제에 의한 1차 간도공산당사건에서  동만구역국 책임비서 정재윤(안기성)과 림계학, 동흥중학교 교장 박재하 등 29명이 서울에 압송되고 각기 4, 5, 6년 판결을 받았는데 림계학 등 5명이 4년형을 받았다. 이들은 모두 조선공산당 화요계 당원들이였다.

림계학은 출옥후 룡정으로 돌아왔고 동흥중학교 교장으로 부임. 때는 조선공산당이 이미 공산국제에 의해 취소되고 학교내 중국공산당 지부가 파괴된 후였다. 그러나 반일지사로서의 림계학의 립장은 변함이 없없다. 이런 교장의 주도로 장하일은 조선 황해도 장연에서 룡정으로 왔고 림계학의 동지로, 견결한 반일지사로 교원활동을 이어갔다. 동흥중학교는 대성중학교와 더불어  사생들의 반일투쟁 열조가 대단하였다. 그 선두에는 림계학, 장하일 등이 서 있었다.

 

(3) 장하일 등의 반일투쟁과 사직

 

그러나 1939 6 15일에 만주국 교육부의 거듭되는 엄령에 의해 동흥, 대성 두 학교는 룡정국민고등학교(1941 7월에는 간도성립 제2국민고등학교로)로 합병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교장은 림계학이 맡고있으나 부교장은 일본인 우시마(宇島)로서 이자가 학교의 실권을 쥐고있었다. 교재는 일본 문부성에서 검정하고 조선 총독부에서 편찬한 교과서를 채용하였으나 장하일 등 교원들은 여전히 일체 교내 외 행사나 교수용어에서 조선어를 사용하였다.

 1939 6월에 동흥중학교 전체학생들이 7일간의 동맹휴학을 단행하고 룡정 총영사관의 밀정 김호연을 붙잡아 혼뜨검을 낼 때 장하일 등이 선두에 나섰다. 1942년 여름이후 학교운영은 말이 아니었고 완전한 노예화교육이 실시되었다. 이에 격분한 교장 림계학 등 반일지사들이 련속 사직하였다. 교도주임 장하일도 사직으로 지대한 분노와 항의를 표시하였는데 장하일이 사직할 때 전교학생들은 일제의 강압통제에 항거하여 "선생님들의 복직을 요구한다."면서 하루동안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교장 림계학은 사직한후 룡정에서 북선려관을 꾸리며 생계를 유지하다가 광복후 조선으로 나갔고 조선 중앙도서관 관장으로 부임하였다. 장하일은 사직하고 귀국한 뒤 《조선일보사》총편집을 맡았고 광복 후에는 북조선 황해도 위원장, 로동신문 부주필로 뛰었다고 한다.

 

4. 강경애와 장하일의 결혼생활

 

강경애는 1931 6월경에 남편 장하일을 따라 중국 룡정으로 이주했다가 1932 6월경 1년만에 조선 장연으로 돌아 갔고 1933 9 경에 다시 룡정으로 돌아온다.  1936년과 1937 사이에 서울과 장연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강경애와 장하일의 결혼생활은 살림살이에 애쓰는 안해에, 술좋아하는 호인 교사남편의 평범한 생활로 보였다고 한다. 실은 장하일이 견결한 반일지사일   이런 남편의 영향 하의 강경애는 이름난 녀류작가였고 1933 11월에 룡정광명학원 사범과의 교원 리주복 등에 의해 조직된 문학동인단체 《북향회》의 동인이면서 고문, 1939년에는 조선일보 간도지국장을 력임하기도 하였다.

룡정시절의 강경애를 두고 그의 이웃에서 작가 안수길은 인상담을 이렇게 쓰고있다.

 

수수한 품이 여느 부인네들과 다를 것이 없어 물동이를 이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살림을 하는 유명한 작가라고 이웃에서도 모르고 있을정도였다.

 

공부관계로 가정 일에 서먹서먹한 강경애는 결혼후 가사 일이 서투러서 남편과 자주 다투는 하였다고 한다. 우물 물을 깃느라고 물동이를 몇개나 깨뜨리지 않으면 빨래할 양잿물에 손끝을 빨갛게 벗기기까지 했다는 일화가 그러하다. 그러면서도 강경애는 살림살이에 충실했고 틈틈히  시간으로 책을 읽고 글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작품을 때면 파지를 엄청 내는 습관이 있고 자기 체험으로 소재를 찾고 답사를 하기도 했다.

강경애의 남편 장하일은 그로서의 개인풍모를 갖고 있었는데 만주 조선인작가로 불리우는 현경준은 그의 문학풍토기간도편 인문평론”(1940.6)에서 그들 부부와 장하일의 풍모를 그려보았다.

 

용정에는 소설가 강경애 씨가 있다. 언제나 건실한 사상으로 착실하게 생활하여 나가는 씨는 항상 건강이 좋지 못한 것이 한이다. 어린애가 없어서 탄식이지만 불건강 때문에 창작을 맘대로 못하는 것이 어찌 자신만의 한이랴?

가끔 찾아가면 그리운 지기를 만난 심정에 소설 이야기 평론 이야기 문단 사정에 대하여 연방 질문하듯 이야기하는 곁에서 부군 장하일 씨는 너그러운 웃음으로 호주(胡酒)생각에 군침을 삼키며 이야기 끝나기를 기다리나 끝이 없는 이야기에 끝이 있을 없다.

기다리다 못해, “여보, 손님을 붙잡고 이야기루만 지날테우? 호주래두 대잡해야지하면 아이구, 구실이 좋구먼. 술생각이 나문 그저 생각이 난다구 솔직하게 고백하구려.”하고는 슬쩍 일어나 주전자를 들고 나가는 씨에게서 나는 소설가라기보담 현처를 느꼈다.

 

이들 부부사이의 일화이다. 장하일은 사람좋은 애주가이고 반일지사이며 강경애가 글을 사람으로 읽어주고 조언해 주는 남편이자 독자이고 비평가이고 동지였다. 그러던 강경애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작가생활에 전념하다가 그대로 나빠진 건강으로 1942년에 남편 장하일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고 1944 4 26 귀가 먹고 앞조차 보지 못할 정도로 병이 악화되여 생명을 마감하였다.

 

본문에서 강경애의 어린 시절과 학교시절, 1929년을 전후한 장연 생활, 강경애의 남편 장하일, 강경애와 장하일의 결혼생활 등을 두고 1931년 전후로 나누어 강경애의 행적을 두루 헤아려 보았다. 강경애는 실로 일제치하 중국 동북에서 생활한 겨레작가들중 거의 유일하게 친일 행위를 하지 안고 반일지사 남편과 함께 지내며 글을 쓰며 사회활동도 하면서 살아간  우리 겨레의 저명한 녀류작가였다.

 

2010 1 23, 강남 두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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